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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하면서 기록이야?

이가 너무 시리아 내전-2. 시리아 민주화 운동 본문

정보 정리/중동

이가 너무 시리아 내전-2. 시리아 민주화 운동

CRAD 2018. 5. 3. 15:43

2. 발발-내전의 발단 시리아 민주화 운동(2011~2012년 7월)

 어차피 터질 일이었다. 우리에게는 자스민 혁명으로 더욱 알려진 튀니지 혁명으로 대표되는 아랍 민주화의 바람은 오랜 대립과 경제적 위기에 위태위태한 시리아에 불을 일어나게 했다. 명분도 좋았다. 우리는 민주화를 원한다! 독재정권 물러나라! 


 중동, 시리아에 대해서 우리가 흔히 접한 이미지는 이정도이다. 크게 관심이 있지 않은 한 독재 세력과 민주화의 세력의 대립으로 우리는 인식할 수 밖에 없다. 그 정도로 소개가 되었고, 또한 처음 아랍의 봄의 시작을 알린 튀니지 혁명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도식화가 되지는 않는다.

 시리아를 둘러싼 민주화 혁명의 구도를 좀 더 세부적으로 나누어보면 이 정도로 표현 가능할 것 같다.

 


 먼저 독재세력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독재세력은 기존의 알 아사드 정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알 아사드는 소수종파인 알라위파이며, 시아파에 속해있다. 또한, 바트당 소속으로서 세속주의,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시리아 내의 소수 종교들을 대체적으로 차별없이 대해왔다. 

 반면,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일반 시민이다. 시리아의 시민의 60%이상은 수니파이다. 수니파는 전체 이슬람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다수 종파이며, 현재는 굉장히 많이 우경화(살라피즘)을 겪었다. 즉, 종교 원리주의로 회귀하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소수종파들에 대한 억압을 찬성한다. 이들은 시리아의 전통적인 지배층이었으나 바트당이 정권을 잡으며 실권을 잃어버렸고,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대부분의 재산 역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바트당에게 많이 빼앗겼다. 


즉,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좀 더 복잡한 사정이 숨어있는 것이다. 특히, 이슬람 원리주의가 사우디의 비호와 함께 힘을 얻으면서 민주화 세력은 동시에 수니파의 권력 반환운동이 되었고, 이는 소수종교들에게는 자신들의 평화가 깨지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많은 소수종교인들이 독재이며 경제적 실패와 정권 독점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지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여기까지 내부의 상황이었던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상황은 어떠한가. 러시아와 미국이 등장할 차례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시리아는 전통적으로 러시아와 우호관계이며, 심지어 타르투스 항이라는 해군기지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가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항이다. 때문에 러시아 입장에서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항이며, 나라이다. 러시아에게 도움되는 것이 미국의 마음에 들리가 없다. 미국은 원래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정부를 눈여겨 보고있다.


자, 여기까지가 시리아 내전 초기 까지의 기본 도식도이다.  먼저 이중에 첫 단계. 독재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대립인 시리아 민주화 운동 단계를 살펴볼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기에는 힘드니 굵직한 사건, 특히 아사드 대통령의 태도 변화를 중심으로 보도록 하자.





1) 시리아의 민주화 운동(2011.1.26~2011.8)

 2011년 1월 26일 첫 시위가 발생한다. 하지만 알 아사드 대통령은 이슬람의 소수 종파인 알라위파이며,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바트당이기에 다른 소수종파 및 시리아 정교회 등 소수 종교인들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독재자라면 지녀야 할 첫 번째 덕목인 의심을 지니고 있었던 대통령은 이미 수많은 비밀 경찰을 이미 운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아랍의 봄이 시리아로 닥쳐올 것을 미리 대비를 했음에 대통령은 재빨리 필요한 조치를 하지만 이 시위가 크게 격화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대통령은 시위대를 달래줄 요량으로 SNS에 대한 자국 내 접속 차단을 해제하고 지방 선거 실시와 비정부 기구의 권한 확대, 언론자유 확대 보장등을 약속하며 대충 이러면 되겠지라고 상당히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시위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으며 갈수록 시위는 격화되었다. 특히, 많은 시위가 발생한 곳은 기존에 이슬람 형제단이라는 단체의 주 활동 지역으로 하마 학살의 무대였던 하마지역과 남부도시 다라지역이다. 뿐만 아니라 현 정권의 주 지지층인 수도 다마스쿠스에서도 많은 시위가 발생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시리아의 민주화 운동 초기에는 어떤 진영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정말 민주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참여를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3월 26일에는 과격 세력이 배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29일에는 내각 총사퇴를 주장했다. 그러나 쟌넨! 이는 시리아 국민들을 놀리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총사퇴를 하지만 내각이 재 구성되기 전까지 그대로 업무를 볼 것이라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국민들은 반발을 하고-대통령은 배후가 있음을 주장하고-시위는 격화하고-시위대를 유혈진압하고의 한국 사람으로서 굉장히 어디서 본 듯한 레퍼런스가 등장한다. 


 이에 아사드 대통령은 48년-48일 아님-만에 비상상태를 해제함과 동시에 시위대에 탱크와 군대를 동원하여 탄압을 시작한다. 이제 더이상 시위대를 국민이 아닌 적군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반정부 성격이 강한 다라 시에서는 군사작전을 펼친다. 5월에는 반군 집중 지역에 모든 언론과 통신을 끊었다. 오바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위대 학살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시위대를 세균(germ)으로 규정하며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라마단인 8월에는 리비아 내전이 끝물에 접어들자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에 부담을 느꼈는지 언플을 했지만 잘 통하지는 않았다. 

 정부군에 대한 온갖 괴담이 사실로 밝혀지고 있었다. 13살 소년 성기 절단 고문치사 사건, 시위대 여성 성폭행 명령, 군함으로 함포 발사(ap통신), 세 살 아이 살해 사건(cnn), 18세 소녀 살해(엠네스티) 등. 국제 여론이 좋을 수가 없다.







2) 국제적인 압박의 시작 - 인지 부조화(2011.11~2012.7.14)

 10월 4일에는 아사드의 유혈 진압 중단을 촉구하는 안보리 결의안이 부결되었다. 이 결의안에서 레바논과 브라질, 남아공, 인도가 기권하였고, 러시아와 중국이 반대하였다.


 아랍연맹에서도 이 기조는 여전하여 시리아의 회원 자격을 정지하였다. 여기서 레바논과 예멘, 시리아가 반대하고, 이라크는 기권을 하였다.

 왜 그들은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비호하는가.


 러시아 -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러시아는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항으로 시리아의 타르투스 항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군항이다. 

 러시아는 시리아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1944년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 후 1945년 시리아를 유엔 창설 멤버로 참여시켰다. 1946년에는 프랑스와 영국군의 철수를 주장하고 지지하였다.  1971년에 현 대통령인 아사드의 아버지인 하페즈 대통령 때에는 타르투스 항을 지중해 주둔 소련 해군을 지원하기 위한 군함 보급 및 수리 기지로 건설하였다. 기능이 축소되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옛 소련권을 제외한 외국 유일의 러시아 군사기지로 남아있으며 대규모 해군기지로 확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아사드 정권 때에도 러시아는 2005년에 무기 구매로 진 134억 달러 중 98억 달러를 탕감해줬다. 조건은 러시아제 무기를 구매하는 조건이었다. 이후에도 시리아는 러시아의 무기 시장의 큰 손이며, 지중해 진출의 전략적 기지이다.


 중국-아랍 민주화 혁명의 파급이 중국까지 미칠 것을 우려한 것이 첫 번째. 시리아의 세 번째 수입국으로서 중국으로서도 중요한 수출국이자, 석유 수입국이다. 중국 국영 에너지회사인 CNPC와 깊은 관계이며 화학기업 시노켐도 시리아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각주:1]


 레바논 - 레바논의 헤즈볼라는 중동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대립의 최전선에 서있는 단체이다. 그렇기에 시아파임에도 불구하고 수니파를 비롯한 다른 중동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으며 레바논의회에 정식 진출을 넘어 지배적인 당이 될 수 있었다. 맞다. 시아파이다. 때문에 이란과 시리아에게 지원을 받았고 시리아에게 도움을 주었다.


 예멘 - 예멘은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가 합법적인 정부의 대통령이지만 문제가 많다. 첫 번째는 정권을 잡았을 때는 아사드 대통령보다 더 나을 것 없는 방법으로 상하원을 장악하여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 두 번째는 후티 반군(시아파)으로 인하여 가택 연금되어있다가 남부로 도망나온 상태라는 것. 제대로 된 대통령이 아니다. 의미없다.

 물론 아랍연맹이 딱히 평화를 더 추구해서 이러한 결과가 나온 건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아사드 정권이 대부분이 수니파인 연맹 안에서 소수인 '시아파'이면서 그 중에서도 소수종파인 '알라위파'이기 때문이다. 


  12월 7일에는 스스로 미쳤다고 공언을 했는데 지도자가 미쳤다면 몰라도 세계 어느 정부도 국민들을 죽이지 않는다며, 대부분의 국민이 자신을 지지하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abc방송) 점차 유체이탈 화법, 혹은 인지 부조화라고 볼 수 있는 상태가 되버린다. 


 해가 바뀌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에 당시 우려 장인 반기문 UN사무총장은 시리아 정권에 우려를 표했다. 안보리에서는 러시아와 중국의 거부권으로 결의안이 거부되었다. 총회에서는 가결되었지만 무슨 총회는 의미가 없다.(137개국 찬성, 12개국 반대, 17개국 기권)


 5월 반정부 정서가 강하여 민주화 운동의 중심 도시가 된 홈스 주에서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훌라 시 탈라 마을 근처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유엔 공식 사망자만 108명이며, 이중 어린이가 49명, 여성이 34명을 차지한다. 이에 많은 서방국가들이 시리아 대사를 추방시켰다. 이는 끝까지 시리아 편일것만 같던 러시아가 손을 떼게 만들었다. 이제 더이상 민주화 운동으로 볼 수 없는 상황에서 7월 14일 국제적십자위원회에서 작금의 상황을 내전으로 규정하였고, 이제 사건은 시리아 민주화 운동에서 시리아 내전으로  이름이 달라지게 된다.

 

알 자1지라의 기사[각주:2]





3) 시리아 민주화 운동의 정리와 내전의 전개.


 시리아 민주화 운동의 단계만 지켜보자면 아사드라는 독재자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시민들을 학살하며 국제적인 압박을 받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이 사건이 이 구도로 계속해서 이루어졌다면 아사드는 국내외적인 압박에 이기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망명을 하거나 아니면 주살 될 수조차 있었을 것이다.

 이 단계만 하더라도 민주화 세력은 종파로 나뉘었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이라고 볼 수 있으며 민주화 세력들도 민주화 외의 다른 요구를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거의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내전 단계로 들어가고 정부의 진압이 강력해지면 이 민주화 세력들은 어느새 종파별로 묶이게 되었다. 특히 와하비즘, 살라피즘 등 원리주의가 득세를 하게 되면서 민주화 요구는 어느새 소수종파들에게 민주화가 되면 자신들이 죽는다고 인식이 되었다.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라도 독재 정권에 알라위파, 시리아정교회 등을 포함한 소수종파들이 생존을 위해 정권에 충성하는 모양이 되기 시작한다. 


  1. http://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2415 [본문으로]
  2. http://www.aljazeera.com/news/middleeast/2012/07/2012716231913738.html [본문으로]